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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ㅁㅅㄸ
#1, ID: f71c54 -
| 어둠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눅눅하게 눌어붙은 거리의 한쪽 골목.

고개를 푹 숙이고 검고 푸른 깨진 유리 조각들을 따라가면 어느새 거리에 스며들어, 아무런 표시도 없는 좁은 문 하나를 마주할 것이다.

몸을 우겨넣듯 들어가면 그 문 안은 밖의 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어두컴컴한 공간과 거기서 죽어가는 듯한 희미한 조명. 다만 이쪽의 조명은 창백한 거리와는 반대로 누르스름한 빛을 낸다는 것이 다르다면 꽤나 다른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2, ID: f71c54 -
| 어둠과 누르스름한 광선 이외에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들 중 그리 흥미롭거나, 굳이 자세히 묘사할 만한 것들은 없다.

한쪽 벽 앞에 꼬리잡기하듯 대충 놓여진, 높이도 제각기 다른 길쭉한 탁상들.
그 탁상들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안드로이드. 군데군데 외피가 벗겨져 컵을 닦을 때마다 언뜻언뜻 오른 팔의 구동 장치가 들여다보인다.
그리고 안드로이드의 반대편에는 의자 몇 개만이 띄엄띄엄 불규칙하게 놓여 있었다.


#3, ID: f71c54 -
| 정적 속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안드로이드의 위잉거리는 낡은 관절 모터 소리밖에는 없을 것 같은 그런 곳이지만,

"...오늘도 왔어."

대충 걸친 후드와 구부정하게 움츠린 자세는 그 힘빠진 목소리를 그대로 시각화한 듯했다.
그 남자는 가장 높은 테이블로 터벅터벅 걸어와서는 안락의자를 당겨와 쓰러지듯 그 위에 몸을 뉘였다.


#4, ID: f71c54 -
| "오늘도 아주 엿같은 날이야. ...아니, 제일 엿같은 건 나지."

"주/?/문₩7%하시겠-겠-겠-"

"항상 먹던 걸로 줘."

"주/!/문₩3%₩7%니다받---다."

안드로이드, 혹은 이곳의 주인은 들고 있던 잔과 천을 내려놓고 이내 벽 뒤편으로 위잉거리며 사라졌다.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양 팔을 얹은 채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던 남자는 안드로이드가 떠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5, ID: f71c54 -
| "오늘도 똑같은 하루였어. 허무하게 하루를 낭비했다고. 어제도, 그제도 그랬었고. 내일도
내년도 똑같겠지. 일 년 전 오늘 이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지껄이면서 손톱으로 팔걸이를 톡톡거리며 두드리기 시작했다.


#6, ID: f71c54 -
| "내 인생이란 놈은 변하는 게 없어, 그래, 내가 변할 의지가 있어야 변하든 말든 하겠지, 근데 그럴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변하지를 않는다니까?
씨발, 내가 병신이라 그런 건지, 그래서 병신인 건지, 둘 다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난 씨발 이 거리에서 제일가는 병신새끼란 거야.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고!"

검지 손가락만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던 남자는 어느새 손톱이 아니라 주먹의 딱딱한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쿵쿵거리며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는 새, 벽 뒤로 사라졌던 안드로이드가 무언가로 가득 찬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7, ID: f71c54 -
| "주/./문하시-신-%NULL%의 준비가..."

"... 항상 하던 대로."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메뉴 %NULL%, 옵션은 저번 주문과 동일하게. 가 맞습니까?"

"엉."

"실행합니다."


#8, ID: f71c54 -
| 바구니는 각종 식재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안드로이드가 왼팔을 쳐들자, 팔꿈치부터 손목 안쪽이 열리더니 각종 조리 기구들로 형태가 바뀌었다. 능숙하게 식재료를 다듬으며, 안드로이드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늘도 여느 날과 똑같은 날이셨다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래. 저번에 왔을 때와 똑같아. 모든 게!"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는 누그러져 있었지만, 바깥쪽을 향하던 신경질이 대신 안쪽으로의 한탄으로 바뀌어 있을 뿐인 것 같았다.


#9, ID: f71c54 -
| "저번에도 같은 말을 하셨었지요.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다고."

"내가 바뀔 것 같았으면 진작에 바뀌어 있었겠지... 평생 이렇게 살아갈 새끼인 거야, 나는."

남자에게 말을 걸면서도 안드로이드의 양 팔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끓는 소금물에 면을 잘 흩어 넣은 뒤, 이름 모를 잎 채소의 물기를 털고 줄기는 잘 잘라낸다.
삶아 둔 고기를 토치로 다시 한 번 겉면을 그슬린다.
토치를 꺼내기 위해 왼팔을 회전시키며 안드로이드는 대화를 이어갔다.


#10, ID: f71c54 -
| "바뀌지 않는 이유도 언제나와 같습니까?"

"그렇지."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군요. 언젠가는 바뀌게 될 것입니다."

"좀 더... 의지를 내 봐라, 그런 조언은 없냐?"

남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의자에 널브러진 채 천장만을 보고 있었다. 그런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이.


#11, ID: f71c54 -
|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지도 없어졌다고. 조언해 봐야 실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렇긴 한데, 오늘은 좀 그런 조언이라도 들어 보고 싶은 기분이라서."

남자는 눈만 굴려 안드로이드를 흘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12, ID: f71c54 -
| "저는 상담을 목적으로 개발된 인공지능이 아닌지라, 도움이 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안드로이드가 말을 잠시 멈추자, 남자는 흘끗 안드로이드를 쳐다보았다. 화구 위에 냄비를 올린 뒤 안드로이드는 말을 이었다.

"이곳저곳 고장나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조차도 판단할 수 없지만... 그런 인공지능의 조언이라도 들으시겠습니까?"

"말했잖아, 아무 말이라도 들어 보고 싶다고."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지요. 모쪼록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자는 살짝 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를 바꾸었다. 아까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힘이 들어간 듯한 자세였다.


#13, ID: f71c54 -
| "지금으로부터 20년 정도 전쯤일 것입니다.
그때도 이 거리는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밝고 생기 넘치는 동네였지요. 군데군데 싯누렇게 빛바랜 곳은 있어도, 시커멓게 그늘진 곳은 아니었습니다.
이 가게에도 몇 명의 단골 손님이 있었습니다. 북적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손님들끼리 살가운 대화가 오가곤 했었죠."


#14, ID: f71c54 -
| "그래, 그랬겠지. 나도 옛날엔 이렇지 않았었다고. 친구도 꽤 있었고, 즐거운 추억들도 많이 만들었었지. 나나 이 가게나, 이제는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신세구만. 더이상 즐거운 추억은 쌓일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남자는 큭큭 웃으며 옷 앞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었다. 그리고 나서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고소한 냄새가 퍼져 테이블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


#15, ID: f71c54 -
| "단골 손님 두 분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매일 끼니를 여기서 해결하시는 분이셨고, 한 분은 가끔 오셔서 밤새 이것저것 주문하시면서 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셨지요. 평소라면 절대 마주칠 일이 없었을 두 손님이었습니다."

마침내 냄비에서 보글거리는 소리가 나며 내용물이 끓어오르자, 안드로이드는 불을 끄고 그릇을 꺼내 올려두었다. 미리 얼음물에 담가 둔 면을 둥글게 말아 그릇에 담은 뒤, 냄비를 들고 튀지 않게 조심히 따른다. 마지막으로 고명을 올리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16, ID: f71c54 -
| "으음."

피어오르는 흰 김을 한껏 들이마시자, 남자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의자를 당겨 앉은 남자는 우선 숟가락을 들어 뜨거운 국물을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후웁..."

매번 느끼던 그 맛과 똑같았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온기가 온 몸에 퍼지면서, 긴장과 불안이 녹아내리며 사라진다.

"후우...흐흐흐."

그래. 이거야. 변변찮은 수입도 없는 남자가 이곳을 꾸준히 찾아오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두 사라진 뒤 느껴지는 편안한 기분. 뒷골목에 널브러져 부들대는 약쟁이들도 이런 건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17, ID: f71c54 -
| "매번 놀랍단 말이지."

"좋아해 주시니 기쁘군요. 감사합니다."

"네가 인간이었다면 이런 맛은 내지 못했겠지. 아주... 불안한 맛이거든."

"불안하시다구요?"

"조금이라도 재료의 맛이 강하거나 약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그런 맛이야. 그런데 단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지.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실수했을 텐데.
항상 그 절묘한 비율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은 기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일 거다."


#18, ID: f71c54 -
| 이번에는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는다. 김이 피어오르는 면을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췄다.

"아까 하던 이야기, 먹으면서 들어도 괜찮나?"

"물론입니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단골 두 명이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아, 그랬었지요."

"건망증이 있는 로봇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태는 아닌지라."

어쩌면 고장난 척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남자는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후루룩!"


#19, ID: f71c54 -
| .


#20, ID: f71c54 -
| "어디까지... 아, 단골 두 분 이야기였지요. 그 두 분들은 그 날 함께 이곳을 찾으셨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아는 사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한 명은 밤에, 한 명은 낮에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 날 둘이 찾아왔던 건 언제였는데?"

"아, 그 부분을 빼먹었군요. 밤이었습니다. 날이 바뀌기 얼마 남지 않은 밤이었지요."

"그럼 그, 낮에 오던 손님은 그 날 낮에는 오지 않았던 건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저녁 때는 오지 않으셨죠. 평소에도 그 분은 가끔 저녁은 늦거나 오지 않으시기도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21, ID: f71c54 -
| "별로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대화가 오가기는 했지만,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고요. 반가운 만남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만난 분위기였죠."

안드로이드는 남자를 기다렸지만, 이번에는 아무 질문도 없었다. 남자는 그저 우물거리며 종지에 생강절임을 담고 있었다. 그제서야 안드로이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 분위기였으니 주문도 평소와는 달랐습니다. 각자 메인 메뉴 하나씩, 함께 먹을 사이드 메뉴 하나. 음료는 주문하지 않으셨고요. 앞접시 또한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앞접시 없이 나눠 먹을 사이는 아니었을 테니, 각자 음식만 먹었다고 봐야겠지. 사이드 메뉴는 뭐였는지 기억하나?"

"기억은 하지만, 아직은 알려드리지 않겠습니다."

남자의 눈이 조금 찌푸려졌다.


#22, ID: f71c54 -
|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그런 것까지 숨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계속해 봐."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두 분 모두 사이드 메뉴에는 손도 대지 않으셨습니다."

남자는 질색한 표정으로, 듣기만 해도 숨막히는군, 하고 중얼거리며 입안에 생강절임을 던지듯 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몇 번 떠 먹다가, 아예 그릇째로 몇 모금 마신 뒤 다시 젓가락을 들고는 말했다.

"그럼, 각자 시킨 음식은 모두 비웠나? 계산은 누가 했지? 둘은 식사만 하고 떠났나? 식사 시간은 얼마 정도였지?"

그리고는 다시 면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23, ID: f71c54 -
|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시는 걸 보니 이야기가 맘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두 분이 드신 메인 메뉴가 뭐였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입 안 가득 우물거리며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질문하신 것들 모두 곧 알려드리죠. 두 분 모두 조리 시간이 긴 요리를 주문하셨기 때문에,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화는 짧았고, 정적은 길었습니다. 서로 관심도 없어 보였고, 대답을 바라고 하는 대화도 아니었을 테니까 당연한 것이겠지요. 손님 말대로, 숨막히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폐가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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